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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특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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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이그 특사 사건은 1907년 대한제국 고종이 을사늑약의 무효를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한 사건이다.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파견했으나, 일본의 방해와 열강들의 외면으로 회의 참석이 거부되었다. 특사들은 국제 여론에 호소했으나, 이준의 사망과 고종의 강제 퇴위, 한일신협약 체결로 이어졌다. 이 사건은 일제의 침략에 대한 대한제국의 마지막 외교적 저항으로 평가받으며, 한국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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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특사 사건
개요
이준, 이상설, 이위종
이준, 이상설, 이위종 (왼쪽부터)
명칭 (한국어)헤이그 특사 사건
명칭 (한자)헤이그 特使事件
명칭 (로마자 표기)Heigeu teuksa sageon
명칭 (매큔-라이샤워 표기)Heigŭ t'ŭksa sakŏn
명칭 (문화어)헤그 밀사 사건
관련 인물이상설
이준
이위종
호머 헐버트
장소헤이그 (네덜란드)
날짜1907년
사망자이준
원인을사조약이 대한제국 황제의 뜻에 반하여 일본 제국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폭로하고 을사조약을 파기하기 위함.
결과일본의 고종 강제 퇴위 및 순종 즉위
한일신협약 체결
배경
목적을사조약의 불법성을 국제 사회에 알리고 조약 파기를 요구
대한제국의 주권 회복을 위한 국제적 지지 확보
주요 활동
활동 내용제2차 만국 평화 회의 참석 시도
각국 대표에게 대한제국의 상황을 알리는 외교 활동
각국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일본의 침략 행위 폭로
결과 및 영향
외교적 성과만국 평화 회의 참석 불허, 을사조약의 무효화 실패
국내 영향고종 황제 강제 퇴위 및 정미7조약 체결의 빌미 제공
역사적 의의대한제국의 독립 의지를 국제 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나, 국권 회복에는 실패

2. 배경

19세기 말, 대한제국은 일본, 러시아, 청 등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1904-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은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했다. 1905년 일본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고종은 을사늑약이 무력 위협 하에 체결된 불법적인 조약임을 주장하며,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하고자 했다.[2][3] 1907년,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 파견을 결정했다.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특사 파견을 위한 비밀스러운 준비가 이루어졌다. 전덕기 목사, 호머 헐버트 선교사 등이 특사 파견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905년, 이승만과 윤병구를 포함한 한국 대표단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통해 약속받았던 미국의 선린 외교를 요청하기 위해 포츠머스 강화 회담에 참석했다.[4] 조약 제1조는 다음과 같다.

There shall be perpetual peace and friendship between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and the King of Chosen and the citizens and subjects of their respective Governments. If other Powers deal unjustly or oppressively with either Government, the other will exert their good offices, on being informed of the case, to bring about an amicable arrangement, thus showing their friendly feelings.영어[5]

> 미국 대통령과 조선 국왕, 그리고 각 정부의 시민과 신민 간에는 영구적인 평화와 우호 관계가 있을 것이다. 만약 다른 열강이 어느 정부에 불공정하거나 압제적으로 대한다면, 다른 정부는 이 사실을 통보받는 즉시 우호적인 관계를 조성하기 위해 선린 외교를 펼쳐 우호적인 감정을 나타낼 것이다.

대표단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일본의 한국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기록한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윤병구와 이승만이 공식 외교적 지위가 없다는 이유로 이 만남은 어떠한 의미 있는 결과도 낳지 못했다.

1907년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2세가 소집하는 제2회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이 대한제국 황제의 뜻에 반하여 일본 제국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폭로하고 을사늑약을 파기하고자 했다. 헤이그 특사는 만국 평화 회의에 을사늑약이 '''불평등 조약'''임을 알리기 위해 파견되었다.

1907년 1월 16일, 대한매일신보는 전년도 런던 트리뷴지에 게재된 고종의 친서를 전재하는 형태로 다시 보도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1905년 11월 17일에 일본 사신과 박제순이 체결한 조약을 인정하지 않으며, 국새도 찍지 않았다.

# 이 조약을 일본이 임의로 반포하는 것에 반대했다.

# 독립 황제권을 일절 타국에 양여하지 않았다.

# 외교권과 관련된 불필요한 조약은 강제이며, 내정에 관련된 것도 전혀 승인하지 않았다.

# 한국 통감의 주재를 허락하지 않았으며, 황실의 권한을 외국인이 행사하는 것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았다.

# 세계 각국이 한국 외교권을 공동으로 보호해 줄 것을 희망한다.

3. 특사 명단 및 역할


  • 이상설: 전 의정부 참찬. 1907년 특사로 합류하기 전 북간도서전서숙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15]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준과 합류했다.[22]
  • 이준: 전 평리원 검사. 고종의 신임장과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내는 친서를 소지하고 특사 임무를 수행했다.[22] 상동감리교회의 전덕기 목사 등과 비밀리에 특사 파견 계획을 세우고, 이동 경로와 경비 마련을 주도했다.
  • 이위종: 전 러시아 공사관 참서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특사단에 합류했다. 유창한 프랑스어, 영어, 러시아어 실력을 바탕으로 헤이그에서 열린 국제주의재단 집회에서 《대한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대한제국의 상황을 국제 여론에 호소했다.[22]
  • 호머 헐버트: 미국인 감리교회 선교사. 고종의 밀명을 받아 헤이그 특사 파견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특사들의 해외 활동을 돕고, 일본 제국의 감시망을 피해 헤이그에 도착하도록 지원했다. 프랑스스위스를 경유하며 서방 언론사들과 접촉하도록 도왔으며, '제4의 특사'로 불리기도 한다.[22]

4. 경과

1907년 4월, 이준은 고종의 신임장과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내는 친서를 가지고 서울을 출발했다. 이준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과 합류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위종과 합류했다.

6월 15일, 제2차 만국평화회의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막되었다. 6월 19일 이들은 베를린에서 각국 수석 대표에게 보내는 항고문을 인쇄했다. 6월 25일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세 특사가 헤이그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특사들은 각국 대표에게 '항고사'를 보내고, 비공식 회의보 《''Courrier de la Conférence''》 지에 게재하여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렸다.[22] 6월 29일에는 회의를 주재한 러시아 제국 수석 대표 넬리도프 백작(Aleksandr I.Nelidov)을 방문했으나 면담을 거절당했다. 6월 30일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대표를 방문하여 면담을 요청했으나, 일본 제국의 방해와 열강들의 외면으로 거절당했다.[22] 7월 1일 회의 개최국인 네덜란드 외무 장관에게 면회를 요청했지만 역시 거절당했다.

7월 8일, 이위종은 국제주의재단 집회에서 《대한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라는 제목으로 프랑스어, 영어, 러시아어로 대한제국의 상황을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22] 이 연설은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7월 14일, 이준이 헤이그에서 사망했다.[22] 사인은 불명확하며, 분사, 병사, 자살 등 여러 주장이 있다. 대한매일신보는 이준이 할복 자살했다고 보도했으나, 이는 양기탁 등이 민족의 공분을 이끌어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작성한 허구 기사였다.

7월 16일 이준의 가매장이 치러졌고, 7월 18일 이위종이 헤이그로 돌아왔다. 7월 19일, 이상설이위종런던으로 이동하고, 이후 뉴욕으로 이동하며 외교 활동을 계속했다.

9월 6일 이준의 본 장례식이 열렸다. 10월 18일 제2차 만국 평화 회의는 폐막되었다.

5. 일본의 반응 및 방해 공작

일본은 만국평화회의 수석대표로 파견된 쓰즈키 게이로쿠 특명전권대사를 통해 이 사건에 대응했다.[18]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은 1907년 7월 9일, 1면에 "대(對) 한(韓) 처치 단행의 기 - 헤이그에서의 한국인의 괴(怪) 운동"이라는 제목으로, 일본 정부와 이토 히로부미에게 엄격한 대응을 요구하는 논설을 게재했다.[17]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에서 파견된 다카이시 신고로는 연일 특파원 전보를 통해 현지 정세를 전했다.[18] 7월 4일자 전보에서는 특사들이 아직 신임장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보도했고,[16] 7월 5일자 전보에서는 특사들의 회의 참가 계획이 무산되었고, 향후 운동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고 전했다.[17] 다카이시 신고로는 일본인으로서 유일하게 특사들과 면담을 하기도 했다.[18]

6. 결과 및 영향

일본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22] 1907년 7월 20일 양위식이 강행되었다.[22] 4일 후에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내정권을 장악하고, 군대를 해산시켰다.[22] 일본은 궐석 재판을 통해 이상설에게 사형, 이준이위종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22] 이 때문에 이상설이위종은 죽을 때까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22]

헤이그 특사 사건은 대한제국의 국권 회복 노력이 좌절된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국제사회의 냉혹한 현실과 제국주의 열강들의 이중성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국내외에서 항일 의병 운동과 독립운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1965년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에서 일본의 조약들은 "이미 무효"임이 확인되었다.[11] 한국 측의 분석은 1904년 이후의 모든 조약과 협정의 무효화를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하며,[12] 이는 1907년 네덜란드에서 이준 등이 주장하려 했던 내용과 일치한다.

7. 이준의 사망

1907년 7월 14일 저녁, 이준은 투숙해 있던 드 용 호텔에서 사망했다.[22] 이준의 사망 원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홧병에 의한 분사설’, ‘단독 감염설’(일본 정보문서 기록), ‘자살설’, ‘독살설’ 등 여러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대한매일신보는 이준이 할복 자살했다고 보도했는데, 이는 당시 대한매일신보의 집필진이었던 양기탁신채호, 베델과 함께 민족의 공분을 이끌어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작성한 허구 기사였다.

8. 고종 위임장 진위 논란

앞서 언급된 데 용(De Jong) 호텔De Jong Hotel|더 용 호텔nl에는 고종 황제의 "위임장" 사진이 걸려 있다. 여기에는 "대황제(大皇帝)"라는 글자 아래에 자필 서명과 그 아래에 "황제어새(皇帝御璽)"의 도장이 찍혀 있다. 그러나 이 서명과 도장에 대해 이양재(이준 열사 순국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총무이사)와 인각(印刻) 전문가인 정병례(고암 전각 예술원 원장)는 "위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하고 있다.[20]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이태진은 "임무를 구두로 전달하고 나중에 써 넣도록 한 위임장이 아니겠는가"라고 추측하고 있다. 네덜란드 국립 문서 보관소 담당자에 따르면 "세 사람이 헤이그에서 황제의 위임장을 제시했다는 기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어, 위임장의 존재 자체의 확인이 정식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20]

9. 이위종의 고종 비판

이위종은 헤이그에서의 연설에서 일본 제국뿐만 아니라 고종의 실정(失政)도 비판했다.[23] 그는 장기 집권으로 인한 부패, 과도한 세금 징수, 가혹한 행정으로 인해 한국 국민이 고통받고 있음을 지적하며, 이러한 정치를 '구체제하 정부의 잔혹한 정치'라고 표현했다. 이는 이위종이 고종의 권위는 인정하면서도 고종의 통치에 대해서는 깊은 불만을 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24]

이위종은 미국과 프랑스에서 근대 교육을 받았고, 근대 사상이 유행하던 시기에 청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아버지 이범진보다 정치 사상 면에서 진보된 모습을 보였다. 1919년 8월 모스크바에서 미국의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고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발언을 한 것을 보면, 그의 정치 사상은 군권주의에서 민주주의를 거쳐 사회주의로 전환해 갔음을 알 수 있다.[24]

10. 역사적 평가 및 의의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고종의 특사들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려 했으나, 일본 제국의 방해와 열강들의 외면으로 실패했다.[6] 이 사건은 일제의 침략에 맞선 대한제국의 마지막 외교적 저항이었다. 비록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고 항일 독립운동의 불씨를 지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특사들은 회의 참석이 거부되자 국제 평화 운동가들과 교류하며 한국의 상황을 알렸다.[8] 이위종은 국제 원 앞에서 연설을 통해 일본의 잔혹 행위를 고발했고, 이는 국제 여론을 환기하는 계기가 되었다.[9] 이러한 노력은 기존 국제법의 틀 안에서 비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965년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에서 을사늑약을 포함한 일본의 조약들이 "이미 무효"임이 확인되었다.[11] 이는 헤이그 특사들이 주장했던 바와 일치한다.

헤이그 특사 사건은 제국주의의 폐해와 약소국의 비극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자주독립과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역사적 교훈을 준다. 국제법과 외교를 통한 평화적 해결 노력은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11. 관련 작품

신상옥 감독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화 '돌아갈 수 없는 밀사'(1984년)가 있다.

참조

[1] 서적 Korea Old and New: A History Ilchokak / Korea Institute, Harvard University 1990
[2] 서적 Korea's Appeal https://books.google[...] 1922
[3] 웹사이트 일본인 학자가 본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 헤이그의 굴욕 경험한 이위종, 赤軍에 가담하다 http://monthly.chosu[...] Chosun Monthly 2024-05-04
[4] 뉴스 Korean Envoy to the Peace Conference https://chroniclinga[...] The Pacific Commercial Advertiser 2024-05-03
[5] 서적 Treaty and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Korea. Treaty of Friendship, Commerce, and Navigation dated May 22, 1882. https://books.google[...]
[6] 서적 Korea Old and New: A History 1990
[7] 웹사이트 아관파천과 고종의 항일 독립운동…주한 러시아 대사가 말한다 http://biz.heraldcor[...] 2020-02-28
[8] 간행물 First Impressions of the Second Hague Conference https://archive.org/[...] 2024-05-04
[9] 뉴스 Proposals at the Hague https://timesmachine[...] New York Times 2024-05-02
[10] 웹사이트 4) 특사 파견의 파문 https://db.history.g[...] 2022-07-25
[11] 웹사이트 Treaty on Basic Relations between Japan and the Republic of Korea http://en.wikisource[...]
[12] 웹사이트 For a view of history that puts us at the center, http://english.histo[...] 2010
[13] 웹사이트 【コラム】外交で滅んだ国の外交行動 http://www.chosunonl[...] 2021-03-10
[14] 뉴스 「韓人の運動」 大阪毎日新聞 1907-07-03
[15] 뉴스 「[[デン・ハーグ|海牙]]の韓人と韓廷」 大阪毎日新聞 1907-07-04
[16] 뉴스 「韓人の信任状」 大阪毎日新聞 1907-07-06
[17] 뉴스 「密使李瑋鍾、公開演説を計画」 大阪毎日新聞 1907-07-08
[18] 뉴스 「密使の一人李儁は重病」 大阪毎日新聞 1907-07-15
[19] 뉴스 ソウル市太極旗、李儁記念館に https://www.mindan.o[...] 2021-10-27
[20] 뉴스 http://www.chosunonl[...] 朝鮮日報 2007-07-08
[21] 문서 고종이 직접 헐버트에게 밀명을 보냈다.
[22] 뉴스 「密使の一人李儁は重病」 大阪毎日新聞 1907-07-15
[23] 논문 이위종의 생애와 독립운동 2007
[24] 논문 이위종의 생애와 독립운동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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